정형시의 모더니티에 관한 一考

 

문학박사학위논문, 대전대학교 대학원, 2001.2

비평문학 17, 2003. 07. 10(KCI급; 한국연구재단 등재후보지)

한맥문학 통권 361호 2020.9.25.

(민병기, 「한국의 자유시와 정형시의 관계」(한국시학연구 제4호, 한국시학회, 2001. 5. 10), pp. 117∼143. “주근옥,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기호학적 연구」(문학박사학위논문, 대전대학교 대학원, 2001.2. 22: 심사위원장 문덕수, 인준 2000. 12), pp.206∼291.”와 비교 확인해 보라. 주근옥의 논문이 3개월 앞섰다.)

 

정형시의 모더니티에 관한 一考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_주근옥

  ¬한국 현대시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빛나는 성과_장수익

 

朱 根玉

 

1. 서론

「한국의 자유시와 정형시의 관계」라고 하는 논문에서, 민병기는 “현대시는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로 구분된다. 시조는 정형시 장르의 고유명칭이니, 분명 시의 하위 장르로 현대시에 포함된다”고 전제하면서,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계․문단 모두가 현대시 속에 자유시만을 포함시키고 시조는 제외시키고 있다고 개탄한다. 이렇게 자유시에 경도되어, 시인들이 사적 언어유희에 치우쳐 모호하고 난해한 표현을 즐겨 구사하고, 또 이렇게 현대시가 난해하면서 보편적 서정미와 감동력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그 결과 독자들은 시와 점차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시인들이 근대화에 대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대화의 오류란 근대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서구의 것을 지나치게 추수한 나머지, 우리 고유의 것을 상대적으로 천시하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조건은 서구식 자유운율이 아니라, 시조의 변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제의 표현방식에 여하에 달려있다고 한다. 즉, 이러한 현대시의 특징은 언어의 음악성, 간결성, 상징성에 있다고 한다.

매우 신랄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필자를 비롯하여 朴喆熙, 趙東一, 成基玉 등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시조의 변형이 자유시로 행세하고 있다는 비판과, 둘째 그가 제시하고 있는 현대시의 특징(조건)에 대해서 좀더 천착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전자의 경우, 6행, 7행, 9행 등과 같은 평시조 형태의 변형은 새로운 시 형태(새로운 장르)의 실험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그가 예로 든 자유시를 평시조의 형태로 바꿔놓아도 현대시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역으로 “태산이 높다 하되…와 같은 고시조의 행을 자유운율의 형태로 변형해 놓으면 현대시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사정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전히 현대성(modernity)을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지한 것인지 그는 형태와 상관없이 현대시의 3가지 조건으로 음악성, 간결성, 상징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 또한 이미지즘과 상징주의에서 제시한 조건과 다르지 않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특히 “modernity=상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러할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朴喆熙의 타설성과 자설성에 대한 분석

주목해 볼 만한 견해는 朴喆熙의 他說詩와 自說詩의 관점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 시가에 있어서 근대의 변화를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타설적 요소의 쇠퇴와 자설적 요소의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적 관점에서 가능할 수 있다고 한다. 시조와 개화기 시가와 같은 타설적 시가가 전통적 습관에의 순응 아니면 당시 문화의 일반적 경향을 반영하는 중요한 척도로 삼았던 것에 반하여, 근대이후의 시는 새로운 인간 경험의 국면(개성)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 요소의 변화에 무엇인가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시에 있어서 ‘근대’라고 하는 접두어는 그것이 비록 서구시의 영향에서 자극된 반응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영향은 하나의 자극일 뿐 한국시 전체를 일관하는 내재적 자기 동일성만은 거부시키지 못하며, 이 자기 동일성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속에 유전되어 창조적인 상상력이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곳에서는, 가끔 변형된 모습으로 반복되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이전의 시와는 아예 이질적으로 변질된 것이 아니라 표현양식이 근대적으로 변용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시는 감각보다는 이념이, 현실보다는 관념을 앞세운 타설적 구조 위에서 형성․전개되었는가 하면, 근대 이후의 시는 반대로 자설적 구조 위에서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전자가 창의보다 타의 선험에서 익혀온 바의 질서 있는 配定이라고 할 때, 후자는 개체적 경험에 의한 인간성의 자각 내지는 상상력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설적 요소는 인간의 본원적이며 보편적인 감정으로서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용 한다는 것이다. 그 변용 과정이 시의 질서이며 시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 자설적 형식의 시가 타설적 형식의 시보다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환기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감정이 한국인에게 보편적이고 원시적이고 동일화된 상태를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상상력의 패턴이라 하고, 상상력이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재생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事象과 과거의 事象, 가깝고 먼 事象을 결합․창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상상력은 개인의 무의식 속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개인을 초월한 한 민족의 집단무의식의 심리작용이며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시에서의 근대적 변용이란 타설적 시가에서 부정했던 상상력의 재발견이며 새로운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學之光」,「靑春」등에 실린 10년대의 시가 비록 개화기의 가사와는 달리 개인의 정감을 호소하는 등 분명히 새로운 세계를 전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의 긴장과 경제성이 거의 무시되어 있고, 시 구조의 전략이 이완되어 타령조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10년대의 시가 형식면에서 이미 새로운 것을 갖추었다 해도 自說詩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여 다른 모든 문화적 표현양식과 함께 내부에서 발효되는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朱耀翰의 “불노리”로 대표되는 20년대의 시 또한 자아의 발견과 그것의 강조, 타설적 형식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10년대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20년대의 시가 보여준 감정의 용솟음과 散文化는, 비록 일본 상징시의 자극으로 촉발되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타설적 요소를 강력하게 거부한 사설시조와 맥을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집단무의식으로 이미 있어온 정서적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아의 발견과 그 강조성은 시조와 개화기 시가의 타설적 요소의 구속을 거부하는 감정의 자유로운 발로이며, 그만큼 이념이나 선험을 믿지 못하여 삶의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인식에 도달한 근대적 세계관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래 군림해온 일종의 구속의 형태로부터 정신의 자유에로 귀의하는 일이며, 자설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따라서 모든 문학에 공통적이면서 특히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 에의 귀의는 시가 삶의 모습을 그 전체성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으로 현실에 조응하는 요구라는 것이다.

 

 

    심층: 深淵, 이성, 형식, 가상세계, 암시, 자유

    보편성: 사전적, 역사적, 사회적, 랑그적 의미

    개별성: 감정의 용솟음, 감정의 직접적 토로, 메타포와 같은 파롤적 의미

 

여기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그의 新造語 “他說的 要素와 自說的 要素”를 검토해보면, 리듬의 상위어인 음성(문자)은 의미와 대립하고 이 의미는 다시 보편성(이념․사전적 의미)과 개별성(수사학적으로 표현된 의미)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이 보편성의 의미를 타설적 요소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보편성의 의미 또한 朴喆熙의 타설적 요소와 마찬가지로 선험적이며 사회적이며 관습적이며 개별성이 없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타설적 요소는 의미의 하위개념인 보편성으로, 자설적 요소는 개별성으로 이해하면 틀림이 없다.

이렇게 朴喆熙가 보충 부연함으로써 현대시의 語彙場 개념이 비로소 완성되는 듯하였으나, 자설적 요소의 의미에 와서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 자설적 요소로서의 자아의 발견과 그 강조성을 朴喆熙는 ‘자유’라는 말 하나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의 자유에 대한 의미와 심층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의미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유를 오랫동안 군림해 온 구속의 형태로부터 벗어나 자아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 현상계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제약이라는 것이다. 물론 의미의 개별성으로서의 자설적 요소가 청자로 하여금 심층의 가상세계를 갖도록 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언어의 강제 또는 폭력(직유, 은유 등의 수사적 방법)으로써 그렇게 상상하도록 청자에게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자유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며,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청자 스스로가 가상세계에 몰입할 때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자에 따라서 그 가상세계에 대한 해석이 각각 다르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朴喆熙가 찾아낸 사설시조 가운데에는 분명히 심층의 가상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 예문은 그의 견해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자설성(개별성)의 상위어인 심층에 적합한 것으로서, 그가 이 심층의 가상세계를 표층 의미의 개별성(자설성)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또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초래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이미 발설된 심층의 가상세계(개인의 정감 호소, 감정의 용솟음, 감정의 자유로운 발로)는 가상세계가 아니며, 진정한 자유로서의 심층의 가상세계는 결코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오직 타자의 물성을 인질로 붙잡고 타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는 주인으로 행세할 뿐이다.

이렇게 이론과 이 이론에 적합한 사설시조를 찾는데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이 이론에 적합한 예문으로 朱耀翰의 “불노리”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다), 예문으로 선택된 사설시조에 자유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유시는 서구로부터 전파된 것이 아니고 한국이라고 하는 문화 속에서 스스로 진화한 진화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흠아긔뉘신고건너佛堂동녕僧이외러니홀거의홀로자시房안에무스것려 와계신고홀거사님의노감탁이버셔서거말겻테고버셔걸나왔슴네

 

(홀거사)「어흠아, 긔 뉘신고」

(동녕僧)「건너 佛堂 동녕僧이외러니」

(홀거사)「홀거사의 홀로 자시난 房안에 무스것 하려 와 계신고」

(동녕僧)「홀거사님의 노감탁이 벗어서 거난 말곁애 내 고깔 벗어 걸라왔음네」

 

 

위의 표층의 통사구조는 “고깔을 노감탁 곁에 건다”이며, 그 심층구조는 “동녕僧이 홀거사 곁에 눕는다”라는 것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 심층구조는 발설된 것이 아니며, 이 시조를 읽거나 듣는 청자의 마음속에 포착될 뿐이다. 여기에는 어떤 설명이나 또는 직유나 은유의 언어적 폭력도 없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심층의 가상세계는 오성의 강력한 힘처럼, 또는 독재자처럼 청자를 압도한다.

이렇게 사설시조가 곧 자유시라고 하는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같은 방식으로 분석하고 있는 평시조의 경우에, 그는 어떠한 명칭도 부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A) 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뭇쳐셰라

柴扉을 여지마라 날리 뉘이스리

밤듕만 一片明月이 긔벗인가 노라

 

(B) 山村에 밤이드니 먼듸 즈져 온다

柴扉를 열고보니 하이고 달이로다

져야 空山 잠든달을 즈져 무슴리오

 

(A)는 영상까지 지낸 바 있는 申欽의 시조이며, (B)는 기녀 千錦의 시조이다. 두 시조는 같은 제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전자는 관습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조선조 사대부 양반의 감정을 공식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조선조의 개성을 부정하고 보편성을 긍정하는 바로 그 유교적 선험에 순응하는 시정신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설시조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는 ‘공산’과 “잠든 달”과 같이 서로 대립되는 정서를 함께 지니면서 이루어지는 갈등으로 착색되어 있으며, 그 갈등 때문에 시조의 구조가 역동적일 수 있게 하면서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구실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자의 달은 새로운 경험이며 놀라움으로서, 이 시조를 자설시조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를 도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③ 위 도표에 나타난 자설성(개별성․자유) 시조의 분석

위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가 자설적 요소로서의 자아발견과 그 강조성을 ‘자유’라고 한 언급이 거듭 확인되고 있는데, 여기서의 자유의 의미는 운율의 자유로움이 아니라 ⓐⓑⓒⓓ가 개별적으로 수행되는 파롤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유의 의미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정설로 여기며 주장해오던 자유운율과는 다른 의미에, 즉 어휘장 또는 의미장의 계열관계 내지는 결합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매우 진보적인 관점을 마치 극 또는 마술의 반전과 같은 연기(performance)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나, 사실은 자유운율이 개성적인 운율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보편적이어서는 안 되고 개별적인 의미(자설성)여야 한다는 하위어 하나를 더 만들어 냈을 뿐이며, 이 개별적 의미로서의 자설성(개별성)은 선행 연구자들이 밝혀냈던 靈律, 呼吸律, 암시 등의 심층의미보다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여하간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千錦의 평시조에도 자설성의 자유가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조가 비록 정형율이기는 하지만 자유시(현대시)의 핵심조건인 자유가 분명히 들어있는 것이니 “자유시(현대시)”가 아니겠는가? 이에 대한 언급을 그는 유보하고 있다.

 

3. 趙東一의 전통운율의 변형에 대한 분석

자유운율(개성율, 내재율)뿐만 아니라 의미의 개별성(자설성)의 발견으로 현대시의 개념 또는 어휘장이 완성되는 듯하였으나, 명쾌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있는 터에,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와 그 실마리가 풀릴 수 있는 가능성의 계기를 마련한 학자는 趙東一이다. 그는 현대시가 전통적 율격(정형운율)을 어떻게 계승하였는가에 현대시 이해의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데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이와 같이 된 이유는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는데, 문단에서는 현대시가 시작된 이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유시가 지상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했고, 시를 논할 때 완전한 자유시가 되지 않은 점은 중대한 결함이라고 말하는 비평이 유행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중대한 결함이라고 한 것을 진지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학계에서는 전통적 율격에 관한 연구를 수십 년 동안 해왔으나 그 연구 방법이 한국시가의 본질과는 다른 일본시가의 율격론에서 도입한 음수율의 연구였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연구가 아니기 때문에 볼만한 결론이 없는 것은 당연하며, 현대시에 나타난 전통적 율격의 계승에 관한 논의가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애초부터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후 음수율적 연구 방법론이 비판되면서 음보율로 그 방향이 바뀌게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전통적 율격도 현대시에 계승될 수 있다는 이론적 기초가 마련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韓龍雲, 金素月, 金永郞, 李相和, 李陸史 등의 자유시를 분석하고, 그 결과 이들의 시 속에는 일정한 율격적 규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이 규칙적인 율격이 전통적인 율격 그대로가 아니고 그것을 변형시켜 새로운 규칙을 창조하고, 이 새로운 규칙이 그 시에서만 존재하거나 그 시를 창작한 시인의 작품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경우에는 자유시라고 불러도 무방하며, 그러므로 자유시는 율격을 가지지 않는 시가 아니고 작품마다의 독자적인 율격을 가진 시라고 정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자유시 옹호론자들은 자유시의 이러한 내재율(심층의미가 아니다)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도, 전통적 율격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 하고, 전통적 율격과 일정한 관련을 가진 자유시는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작품이거나 시인의 시작태도가 불철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처리하는 것이 오랜 관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시인들을 그러한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그들은 시작태도가 철저했기 때문에 전통적 율격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이것을 새롭게 변형하고 창조하여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趙東一의 견해는 자유시 옹호론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지만, 매우 예리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유시(자유운율)=현대시”의 통설을 뒤집는 주장이 될 수도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정형 율격을 파괴한 자설 사설시조와 정형 율격의 자설 평시조에서 제기된 문제, 즉 千錦의 평시조 안에 심층의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유시(현대시)라고 명명하기를 유보했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朴喆熙에게서 발견된 이 문제를 푸는데 다시 한번 벽에 부딪치고 만다. 즉 趙東一은 “전통적 율격을 계승한 현대시(cf. 앞에서 전통적 율격 그대로가 아니고 변형시켜 새롭게 창조한 규칙이라고 한 말을 상기하기 바란다)는 한국적인 것을 지니고 있어 좋기는 하나 이미 이루어진 형식에다 생각을 맞추기 때문에 자유롭고 개성적인 발상을 담을 수 없는 결함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적지 않다. 이러한 지적은 전통적 율격을 충실히 따르려고만 한 시, 예컨대 金億의 시 같은 데서는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운율의 하위개념은 “전통운율 vs 변형운율”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변형운율(예를 들어, 1행이 2음보이면서 2행 1절을 이루고 이것이 3개인 6행시 같은 변형)을 고정시켜놓고 여기에 맞춰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처음에 기대했던 전통 운율의 옹호가 아니라 부정이며, 다시 말해서 전통 율격을 변형하여 새롭게 창조한 율격에 충실히 따르기만 할 때에는 현대시가 될 수 없다고 간파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술은 전통적 율격과 일정한 관련을 가진 자유시는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작품이거나 시인의 시작 태도가 불철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오히려 韓龍雲, 金素月, 金永郞, 李相和, 李陸史 등의 시작태도가 철저했기 때문에 전통적 율격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이것을 새롭게 변형하고 창조하여 계승할 수 있었다고 한 주장을 스스로 뒤집고 그들과 같은 궤도에 머무르고 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시의 조건 중의 하나인 자유운율과 전통 운율의 변형 이외에 만약 연 구분이 없는 운율을 생각하고 있다면, 서구 시형식의 "blank verse(連歌體)" 하나를 더 추가한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enjambement'와 "blank verse"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전통 운율을 충실히 인정한다는 것으로서 자가당착이며 결코 새로운 관점이라고 할 수 없고, 朴喆熙의 견해보다 앞선 것이라고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율격을 엄격히 지키고 있는, 기녀 千錦의 심층의미가 존재하는 평시조를 趙東一의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종합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① 자유운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현대시인 것은 아니다.

② 정형운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전통시인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자유운율은 물론 朴喆熙가 주장하는 자설적(개별적 의미)요소나 趙東一의 “전통적 율격의 변형 내지는 창조” 모두 현대시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형운율이거나 이것의 변형이거나 새로운 창조이거나 또는 더 새로운 개성율(내재율)이거나 상관없이, 또 의미의 개별성(자설성)과도 상관없이, 다른 무엇인가에 의하여 현대시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아주 독창적인 내재율(자유운율)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같은 율격이라도 정형운율의 시보다 더 높은 가치가 주어져야한다는 것은 틀린 지적이 아니다. 이것을 기호 사각형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위의 왼쪽 도표에서 보는 주체(C1)로서의 개별적 자유운율은 反주체(C2)인 보편적 정형운율과 非주체(1)인 非개별적 非자유운율을 갖게 되고, 非보편성과 非정형운율과 대립한다. 이것은 기왕에 발설된(표층으로 나타난) 것으로서의 사회적 가치, 즉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이다. 오른쪽의 주체로서의 이성(가상세계)은 反주체인 오성(현상계)과 非주체인 非이성을 갖게 되고, 非오성과 대립한다. 오른쪽의 도표는 청자만이 만이 가질 수 있는 개인적 가치이다. 이러한 개인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어느 순간에 합쳐져(詩作 행위에 의한 변형, syntagme) 통사구조를 이룰 때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정형운율 속에 이성(가상세계)이 숨어들어 옴(合接, sl+s2)으로 해서 표층의 非이성․非보편성․非정형운율과 非오성․非개별성․非자유운율에 변형이 발생한 것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앞에서 도출해낸 종합명제 ①과 ②의 명제가 眞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즉 자유운율이거나 정형운율이거나 상관없이 그 심층에 이성(가상세계)만 있게 되면, 현대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 현대시의 조건인 자유의 의미

이러한 관점은 成基玉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자유시’라는 명칭이 현대시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오늘날, 새삼스레 시의 율격을 들추어 거론한다는 것이 현대시의 창작에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자문하면서, 현대시가 전통적인 율격의 질곡으로부터 이미 벗어나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는 일 외에 율격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자탄하기까지 한다. 그만큼 현대의 자유시는 율격론이 거부할 수 없는 시인의 창조적 개성문제와 직결된 그 자체의 역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존립근거와 미학적 기반 역시 확실한 논리에 입각하고 있으며, 그 필연성을 의심하거나 그 가치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당연함과 필연성을 문제의식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때 사정은 간단하지가 않은 것인데, 먼저 자유시의 율격적 ‘자유’가 그 진정한 의미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사될 때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 한국시의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자유시에 대한 이해가 매우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시작품들이 한국의 전통적 율격을 근본적으로 무시하거나 외면함으로써 전통적 율격과의 통로를 철저히 차단해 버리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시가 뜻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전통적 율격과의 통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인식되는 고립된 자유가 아니라 그것과의 팽팽한 대결로부터 인식되는 자유임을 명념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새로움이란 무엇에 대한 새로움이며, 새로운 질서란 기성질서와의 팽팽한 대결적 긴장관계에 놓여있을 때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자유 역시 무엇에 대한 자유이며, 자유시 역시 전통적 율격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엄격한 율격적 질서로부터 벗어나려는 전통율격과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 의미는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학적 구조 또는 변증법적 구조를, 成基玉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체로서의 자유(S1)는 반주체인 제약(S2)과 비주체인 정형시(1)와 단절되어 고립된 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 같지만, 극단적인 자유시론 추종자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관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제약 없이 칼을 휘두르듯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자유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제약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 이것이 확인된다면 자유시 또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는 것이므로 위의 도표 또한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의 위치에 무엇인가 있어야 할 것이다. 비주체(1)인 정형시와 자유시가 제약이며 외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왕에 밝혀져 있으므로, 여기에는 반대의, 다시 말해서 비반주체(2 )로서 비제약의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약의 세계 곧 정형시와 자유시가 언어의 세계이므로 여기에는 그와는 반대의 세계, 즉 제약되지 않는 言語道斷의 세계이어야 할 것이며, 이 언어도단의 세계가 바로 심층의 가상세계이며, 이성이며, 자유의 세계, 절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成基玉은 여기까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낌새를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있을 뿐이지만, 이 정도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이며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한편 鄭漢模의 “엄격한 구분으로서의 내재율은 외재율이 없는 산문 내지 산문시 속에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견해에 착안해서, 강홍기는 지금까지 내재율은 곧 개성율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나오고 있다. 즉 현대 자유시는 “율격의 폭력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자유율과 이 내재율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 내재율은 현대 자유시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정형시에도 내재율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이 내재율은 시 일반에 해당하는 운율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재율 형성 요인은 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시어, 시구, 시행, 시련 등의 의미, 정서, 이미지, 구조, 문체, 구문 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요인들은 자 시에서뿐만 아니라 정형시에서도 훌륭히 갖추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산문시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유시(자유운율)=내재율”이 아니라, “내재율=암시(가상세계)”로 보고 더 나아가 이 암시(내재율)가 정형시․자유시․산문시 어느 것에든지 존재하게 될 때 현대시가 된다는 견해는, 정형시에는 이것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던 견해들에 비해 확실히 놀랄 만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이 내재율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에서, 즉 “내재율은 의미 자질에 의해서 형성된 의미율과 구문 자질에 의해서 형성된 구문율로 크게 양분되는데 전자는 다시 지속적 구조 장치에 의한 반복률, 병렬률, 대립적 구조 장치에 의한 대조율, 경중율, 그리고 전이적 구조 장치에 의한 순환율, 연쇄율, 점층률 등으로 구분되고, 후자는 다시 성분율, 대행율, 대연율 등으로 나누어진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이 내재율에 대한 인식이 외재율의 연구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데, 모처럼 잡은 큰 물고기를 놓치고 만 느낌이 든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관점에 있어서 내재율이 암시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와 같이 내재율은 표층으로 나타나 있어서 언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분석은 내재율(암시) 그 자체의 분석이 아니라 이것을 만들어내는 외적․언어적 표층구조의 분석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5. 결론

자유운율뿐만 아니라 개별성(자설성)의 발견으로 현대시의 어휘장이 구축되는 듯하였으나 명쾌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는 터에 趙東一이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 율격을 그대로 계승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변형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 말은 곧 'enjambement'와 "blank verse"의 방식을 받아들이자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며, 이러한 방식은 金億의 “格調詩形論小考”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도 시조는 너무 간단하여 현대의 사상과 감정을 담기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전통 운율과 서구의 운율 방식을 다듬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梁柱東, 金基鎭, 成基玉, 강홍기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견해에 걸 맞는 시가 창작되고 있었는가? 金億, 金東煥, 金 月 등의 정형시에서 심층의미(이성, 자유, 가상세계, 암시, 모더니티)가 발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朴喆熙가 언급한 千錦의 평시조에서도 확인되었던 것으로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심층의미로서의 자유는, 朴喆熙가 언급하고 있는 보편성(타설성)의 대립항으로서의 개별성(자설성)의 의미가 아니라(cf. T. S. Eliot의 "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에서의 “개성몰각”) 소위 이성으로서의 가상세계이며 대자이며 또는 절대지이며 深淵이며 바로 그것이 모더니티라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아울러 현대시의 조건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현대시의 필요충분 조건은 심층의미(모더니티)이며, 자유운율이나 의미의 개별성이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金億과 趙東一이 부정했던 평시조, 즉 정형운율이건 그것의 변형이건 상관이 없고, 자유운율이 있으면 더욱 좋고, 의미의 개별성 또한 화법상 또는 관습상 허용된 범위 내에서 사용되어도 무방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T. S. Eliot이 보수시와 자유시 사이의 구분은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우수작과 졸작과 무질서한 작품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 말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그의 이렇게 결의에 찬 확신은 F. H. Bradley에게서 약간 보이고 있는 가상세계(물 속 막대의 굴절, 이성적 대응설과 감각적 대응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합설의 아노미 현상), 즉 I. Kant, G. W. F. Hegel의 이성과 비교되는 관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관념은 주관으로부터 객관을 향한 관점이고(왜냐하면, 굴절로서의 이 관념은 실재의 부수물이니까), 이성은 주관으로부터 주관을 향한 관점으로서(비판론의 이성은 실재의 부수물이 아니라 불가사의로서의 물자체이며, 정신현상학의 이성은 대자로서 타자를 통하여 실재를 주관한다), 서로 상반된 관점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에 의하면, 관념을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부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돛이 희망을 표시하듯이 관념은 그러한 것의 상징이 아니다. 관념의 관념성은 관념이 그 스스로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에 있으며, 또는 그 스스로의 관념화를 지향하는 것에 있으며, 그러므로 실재와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관념은 포착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 경우의 관념의 존재는 단지 그 과정 속에 있을 뿐인 것이다. 관념은 완벽하게 포착하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관념에 접촉하자마자 그 전체적인 세계는 그 스스로를 여러 가지 관념으로, 또는 여러 가지 실재로 분해하는 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념은 관념으로서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념이 실재적인 관념인 한 관념이 아니며, 또 실재적이 아니라면 관념이 아니다. 이것은 상상의 관념 또는 회상의 관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위대한 시인의 관념이 변덕스럽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상상은 방자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정신이상자나 발광인의 관념이 시인의 것보다 훨씬 상상력이 풍부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에 있어서 관념의 결합은 다른 어떤 곳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한층 더 확실한 논리적 필연성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데, 그것은 용어가 일상적인 의미 이상으로 또는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것같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미학적인 전개와 표현되어 있는 대상 사이의 관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의 결합은 주관적이다. 그리고 심리학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만약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확실히 내용의 결합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에 의한 작품은 결코 단순히 개인적인 것은 아니다, 만일 그것을 단순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상상력에 의한 것으로 보지 않고, 병리학적 상태의 산물로 보게 될 것이다. S. Mallarmé의 시를 병리학상의 병적 활동에 의한 것으로, 꿈을 설명할 때와 같이, 설명하는 경향을 갖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또 Benjamin Hrushovski가 좋은 작품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시도 자유롭지 않으며, 자유시는 자유를 외치는 함성이지만 예술에는 자유가 없다는 T. S. Eliot의 말에 찬동하며, 예술가가 언어재료를 조직하는데서 예술가의 내면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인데, 언어재료를 구성하는 것은 율격적인 기본 틀의 뒷받침이 없으면 상당히 힘들기 때문이라고 강조한 말, 그리고 H. de. Régnier가 더 많은 자유, 곧 시행의 수효가 많다고 해서 리듬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을 인용하며, 졸렬한 시인만이 자유시를 형식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언급한 주장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M. M. Bakhtin(1895~1975)의 언술의 이질론(raznorechie), 또는 다성성과 대화에 입각한 상호텍스트성 이론과도 일치하며, R. Jakobson(1896~1982)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에 의하면, 시성(poeticity)은 언어가 언어로 느껴지고 이름 불리어진 대상이나 분출되는 정서의 단순한 표현(cf. 의미의 개별성. 韓啓傳의 “思考의 放出,” 朴喆熙의 자설성)이 아닌 경우에 존재하며, 또한 언어들과 그 구성법, 언어의 의미, 언어의 외적 형식과 내적 형식 등이 무심하게 현실을 가리키는 대신에 그것들 나름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할 경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에 있어서의 언어 기호와 대상이 "A=A"라는 방식으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실에 관심을 두게 되는 그 필요성은 언어의 사전적 의미(랑그) 이외에, 그러한 일치의 부적절성(A≠A1라고 하는)에 대해서도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기모순의 본질적인 이유는, 모순 없이는 어떠한 개념의 유동성도 있을 수 없고 기호의 유동성도 있을 수 없으며, 아울러 개념과 기호의 관계가 자동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행위가 멈춰지면 현실에 대한 인식도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 또한 A. J. Greimas의 주체의 부정에 의해 내함관계가 이루어진다는 이론과도 일치하며, Roland Barthes의 “신화에는 형식적 한계가 있을 뿐이며 물질적 한계가 없다”는 말과 “신화의 영속적 알리바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는 말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결론에 적합한 정형시를 제시하여야만 이 논고가 ‘僞’ 아니고 ‘眞’임이 명석 판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이에는 조운의 시조를 제시할 수 있다. 물론 그도 평시조를 변형하여 “쥘상치 두 손 받쳐/한 입에 우겨 넣다//희뜩/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흩는 꽃 쫓이던 나비/울 너머로 가더라//”와 같이 6행으로 만들고 있으나, 본래의 평시조 형태로 되돌려 놓아도 모더니티는 그대로 존속된다.

 

쥘상치 두 손 받쳐 한 입에 우겨 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 울 너머로 가더라

―「상치쌈」(조운) 전문

 

각주(클릭)

(민병기, 「한국의 자유시와 정형시의 관계」(한국시학연구 제4호, 한국시학회, 2001. 5. 10), pp. 117∼143. “주근옥,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기호학적 연구」(문학박사학위논문, 대전대학교 대학원, 2001.2. 22: 심사위원장 문덕수, 인준 2000. 12), pp.206∼291.”와 비교 확인해 보라. 주근옥의 논문이 3개월 앞섰다.

 

정형시의 모더니티에 관한 一考

 

 참고문헌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_주근옥

 한국 현대시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빛나는 성과_장수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