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문(叙事文)

 

한맥문학 통권 365호(2021. 05. 25)

 

마사오카시키(正岡子規; まさおかしき)

朱 根玉

 

1

문장의 재미가 여러 가지 있지만, 옛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 용법에 따른 언어의 장식을 주로 하는 것은, 여기서는 사용하지 말 것. 자칫하면 작자의 이상 등 기교를 부리는 취향의 진기함을 주로 한 글을 사용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사용하지 말 것.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 나타난 사물(자연계 및 인간계에)을 묘사해서 재미있는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혹은 경치와 인간사를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문장으로 직접 만들어 독자와 자신과 함께 느끼게 되는 것은, 언어를 장식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단지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그 사물을 묘사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예를 들면, 스마(須磨; すま)의 경치를 언급할 때,

 

산수가 맑아 뛰어나게 아름답고, 특히 공기가 청결해서 기후의 변화가 적고 요양 손님의 병을 저절로 낫게 한다.

 

등으로 쓰는 것은 아무 재미도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스마(須磨)는 후에 하리마나다(播磨灘; はりまなだ)에 접한 작은 공지의 소나무 숲이 있어 그곳에 여관과 별장이 있다. 모래가 하얗고 소나무가 푸르러 실로 청결한 느낌이 든다. 바닷물도 깨끗해서 해수욕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아쓰모리(敦盛)의 무덤은 서스마에서 서쪽 방면에 있고 그 앞에 소위 아쓰모리 소바가 명물로 남아있다. 스마데라(須磨寺)

등으로 쓰지 않았는가. 앞의 문장에 비해 정밀하게 묘사가 아니라 서술한 기분이랄까, 스마를 묘사했다고 치더라도 스마 경치의 움직임은 오히려 볼 수 없다. 그 위에 체재를 바꿔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평소대로 훌쩍 숙소에서 나왔다. 불타는 태양의 그림자는 뒷산에 숨고 석양의 잔영은 시오야(塩屋; しおや)의 하늘에 머물고 있다. 길가의 모래도 서둘러 열이 가라앉아 서늘한 솔바람이 불어온다. 좁은 땅에 별도로 신기한 곳도 없어 아쓰모리(敦盛; あつもり)의 무덤에나 갈까 생각하고 왼쪽으로 갔다. 아쓰모리(敦盛)의 무덤까지 한 마을 정도의 거리니까 곧 닿을 수 있지만, 처음부터 참배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큰 오륜탑과 잠시 눈싸움할 정도다. 앞에 있는 향꽂이의 야다이(屋台; やたい; 작은 집 모양으로 지붕을 달고 이동할 수 있게 만든 대) 같은 것을 손으로 두드리고 쓰다듬고 요리조리 보다가 그래도 흥이 모자라 다시 돌아가 돌변하여, (; のう) 송풍(松風: まつかぜ) 속의 노래 わくらはにあらば須磨藻塩たれつゝわぶとへよ(우연히라도 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스마 해변에서 조염(藻塩; もしお)의 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것처럼 울며 외롭게 살고 있다고 대답해 주게)”라고 입속으로 읊조리며 어슬렁어슬렁 다시 돌아왔다. 숙소의 문까지 왔을 때 해가 완전히 기울어 등불이 둘 셋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 않아 문 앞을 그냥 지나쳤다. 가도(街道) 우측의 철로를 따라 움푹 팬 도랑이 있어, 그곳에는 작은 꽃들이 수북하게 피어 있다. 땅거미 속에서 꽃만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마치 많은 나비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랑엔 물이 없어 아래로 꽃을 찾아 내려가 사오십 가지를 꺾었다. 그리고 물가에 나가 파도가 밀어닥치는 그 끝자락을 서벅서벅 밟으며 걸어갔다. 서늘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고 있지만, 바람이라고 할 만한 바람이 불지 않아 바다는 아주 조용했다. 발걸음이 지친 채 조르르 조르르 겨우 때리고 있는 파도에 일부러 발을 적시며 잠시 멈춰서 깜깜한 난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붉은 점처럼 생긴 것이 아득히 멀리 보였다. 어화(漁火)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보고 있으면 붉은 점은 점점 큰 원이 되어간다. 쟁반 같은 달이 드디어 바다 위에 나타났다. 잠든 것 같은 해면이 아련히 밝아왔다. 게다가 눈앞 해변의 바다가 어지럽혀져 불규칙하게 파도가 일어 혹시 배를 저어오는 것 아닐까 생각하며 보고 있는데 어휴 아니다. 몇 번이고 살펴보아도 의심스러웠지만 참았는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 뚫어지게 보니까 새하얀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하얗다고 생각하고 잘 보면, 흰 기모노(著物; 着物)를 입은 두 소녀였다. 소녀의 유방 언저리까지 파도가 넘실거리고, 둥실둥실 뜨면서 소녀는 손끝으로 물을 젓고 있다. 휘저어 섞인 물은 작은 파도를 일으켜 반짝반짝 달빛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망연히 그림 안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이와 같이 작자를 토대로 작자가 본 것만을 본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사물의 형편에 따라 흥미의 얕음과 깊음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독자와 작자가 같은 지위에 서 있는 효력이 있는 것, 작자가 혹시 스마에 있다면 독자도 같이 스마에 있는 것 같은 느낌, 작자가 혹시 눈앞의 미인을 보고 있다면 독자도 역시 눈앞의 미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을 세밀하게 서술한 글의 장점으로서, 이 글의 목적도 역시 독자의 동감을 끌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日本付録週報 메이지(明治; めいじ) 33=1900. 01. 29().

 

2

연말연시의 의식풍속으로 연하장을 보내고 각지에서 보내오는 선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글의 체재는 개성적이지 않아 약간 평범하고 정취가 없는 것으로(無趣味) 빠져버리는 것이니 매우 유감스럽다. 풍속의식이 매우 달라 재미가 있을 때는 그냥 그 풍속의식을 개념적으로 기술하는 것도 기분의 재미있는 맛을 생기게 한다고 해도 여전히 건조함에 빠져듬을 면하지 못한다. 더구나 풍속의식에 약간의 정취가 있을 때 그것을 대략 기술하는 정도가 되는 것이니, 혹은 독자의 하품을 불러일으키게까지 이르게 되는, 예를 들어 사기쵸우(左義長; さぎちょう) 또는 돈도(爆竹; どんど)를 기술하는 것이니,

 

우리 지방에서는 일월 모일 사기쵸우라고 하는 행사가 있다. 그 방법은 전날 아이들과 동반하여 집집마다 돌며 그 집의 장식을 모으는 등이튿날 아침 교외에 3칸 내지 5칸 가량 보이는 정도의 장식의 탑을 쌓는 등이것에 불을 붙이면 순식간에 화염이 하늘로 치솟아 마침내 탑이 붕괴되는 등이때 갖고 온 떡을 대나무 끝에 끼워 그 불 속에 넣고 구워 먹는, 운운

 

등으로 쓰는 것은 사기쵸우의 방법의 대부분을 알고 있는(이것은 지식 상에서) 것이라고 해도, 사기쵸우의 정취를 정말로 느끼는(이것은 감정 상에서)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문체를 사용해서 쓰인 대동소이의 사기쵸우의 기사(記事)는 각지에서 전해져도, 선택하기 어렵고 마침내 어느 것도 게재가 불가능하다. 혹시 어느 한 사람이 일부러 사기쵸우를 보러 가서 그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쓰지 않는다면 반드시 재미있는 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 구름이 한쪽으로 덮여 하늘은 여전히 눈이 올 기미를 보이고 있다. 들로 나가면 북쪽으로 보이는 산맥 한쪽이 눈을 뒤집어쓰고 그중 제일 높은 것은 00산이다. 그곳의 보리밭과 유채밭 한구석에 아직도 눈이 남아있다. 운운

 

불은 점점 넓게 번지고 대나무의 튕기는 소리는 실로 거칠어지고 갑자기 산바람이 불어온다 생각하는 순간 불길이 끝까지 치솟아 올라, 순식간에 눈앞에서 한 개의 불기둥으로 나타났다. 운운

 

이와 같은 체재로 쓰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대규모의 사기쵸우라고 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면 완전히 그것을 눈앞에 내놓을 수 없다고 해도 혹시 현지의 사기쵸우를 본 사람이 본 그대로 묘사해서 내놓는다면 반드시 사기쵸우의 불기둥이 독자의 눈앞에 당연히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작자 자신의 실 경험을 묘사한다면 그 기사는 어느 일부에 한정된 것이며, 전체의 풍속의식을 모두 묘사할 수 없다고 하는 결점이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글 곧 재미의 측면에서 본다면 전체를 묘사하는 것에는 추호의 결점도 없다고 보며, 오히려 어느 일부분의 실체가 눈앞에 나타나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공상과는 거리가 멀고, 실제의 느낌에 가깝게 된다.

어떤 사람이 칸고리(寒垢離; かんごり)라고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다음의 예와 같이 현지의 칸고리라고 하는 것은이라고 하며 붓을 들어 쓸 때, 그가 어느 부류의 사람인가 하는 그 모습, 복장 등을 기술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재미가 없다. 혹시 칸고리를 위한다고 한다면 자신부터 현지에 보러 나가 그것을 묘사하여 내놓는 것과 같지 않다. 게다가 서두에 붙이기등이 있어도 좋다. 예를 들어,

 

오늘 밤은 칸고리를 본다 생각하고 일부러 밖으로 나갔다. 달은 밝고 바람은 살을 에는 듯 불고 있다.

 

등으로 붓을 들어 쓰고,

 

얼마간 길거리에 서서 기다려도 칸고리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밤이 점점 깊어 가지만 지상에서 묘사하려고 하는 자신의 그림자는 작아지고 발바닥이 얼어붙듯 차가워진다.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뺨에 좁쌀이 돋는 듯한 생각이 든다. 딸랑딸랑 하는 방울소리가 들렸다.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그쪽을 보니 우동집(饂飩屋) 주인이 짐을 짊어지고 지금 돌아온 것이지, 칸고리하는 사람이 왔다고 하는 방울소리가 아니었다. 실망한 나머지, 꼼짝 않고 곁눈질하고 있다가 우동집 주인이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뭔가 나쁜 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빠른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느닷없이 이봐하고 소리를 지르니 하고 놀라 응답하고 멈춰 섰다. “이봐, 우동 한 그릇 주게하고 말을 건네니까 그가 안심한 모습으로 짐을 풀었다. 달걀 우동을 냄비에 넣고서 오늘 밤은 근래에 없던 추위이옵니다. 우리들은 불을 취급하는 장사꾼이옵니다만, 그것으로는 오늘 밤 견딜 수 없사옵니다.” 등 판에 박힌 말을 하고 있다. “이봐, 이 근처에 칸고리하는 사람 지나가지 않았는가.” “.” 하고 의아한 듯 응답한다. “어떤 칸고리말이야 칸고리 녀석 이곳을 지나가지 않았는가.” “, 00不動明王(ふどうみょうおう)에 도착했습니다만 사람들이 한두 사람 지나갈 뿐입니다. 칸고리와 저희 젊은이들은 아직 폐물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칸고리 라고 하는 것 소용없사옵니다.

 

등 소용없다고 쓰고

 

딸랑딸랑. 하얀 기모노를 입은 한 사람이 나타났다.

 

등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서두 곧 서막도 장황하지 않은 한에서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해도, 있지 않은 것을 탁상 위에서 만들어 서두로 사용하는 것은 안 된다. 우리가 이곳에서 예로 쓴 기사도 혹시 현장을 보고 썼다면 몇 배의 재미의 맛이 증가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日本付録週報 메이지(明治; めいじ) 33=1900. 02. 05()

 

3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실제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잠정적으로 사실이라고 한다. 사생(写生)이라고 한다. 사생은 화가의 언어를 차용한 것이다. 또는 허서(虛叙: 전에 槪叙라고 한 것과 동일)라고 한 것과 대비해서 실서(実叙)라고 해도 되는 걸까. 게다가 허서는 추상적 서술이라고 하는 것이며, 실서는 구상적 서술이라고 해도 가능한 것 아닌가. 요컨대 허서(추상적)는 사람의 이성에 호소하는 일이 많으며, 실서(구상적)는 거의 전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허서는 지도(地図)와 같고 실서는 회화와 같다. 지도는 지세를 대충 눈으로 보도록 하거나 어떤 한 장소의 경치를 보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유쾌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회화와 같은 것이다. 문장(文章)은 회화와 같이 공간적으로 세밀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많은 조화(粗画; 대강 그린 그림: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의 정밀화(密画)를 만든다)를 매수와 상관없이 시간적으로 연속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의 장점이다. 그러나 보통의 실서적 서사문은 너무 오랫동안 연속적으로 하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을 11분의 작은 부분으로 끊어 세밀하게 묘사하고, 분초 단위로 변하는 모양을 연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실서는 사생(写生)이라고 하는, 사실(写実)이라고 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양과 다름이 없다고 해도 물론 약간의 취사 선택을 요구한다. 취사 선택은 재미있는 곳을 취하고 재미없는 곳을 버리는 것이며, 반드시 대()를 취하고 소()를 버리며, ()을 취하고 단()을 버리는 것에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장소에 가는 도정을 기술할 때

 

분명히 1번 기차에 타기로 약속했는데 00()는 아직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선례가 있는 잠꾸러기, 골치 아픈 물건이다, 라고 투덜거리며 △△()와 함께 표를 끊고 기차에 올라탔다.

 

이와 같은 상태의, 어떤 재미있는 맛도 없는 것을 길게 쓰는 것은 좋지 않다. 약속했던 친구가 오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에는 현저하게 영향을 주는 것이 될지라도 독자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일으키지 않는다. 혹은 밥 먹는 것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 등도 좋지 않다. 무엇이든 그 사람에게 매우 유쾌함을 주고 또는 불쾌함을 주는 것이라고 해도, 독자에게는 추호도 동감의 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한 그릇의 밥으로 유한(幽閒)한 정취를 즐기는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 재미가 있긴 해도 보통의 음식은 되도록 짧게 서술하는 것이 좋다.

어떤 경치 어떤 인간사를 서술할 때 가장 아름다운 곳 또는 더없이 깊게 느끼는 곳을 중심으로 묘사하면 그 경치 그 사건 자체로부터의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최고의 아름다움과 더없이 깊은 느낌이 있는 곳은 꼭 언제나 큰 곳 분명한 곳 필요한 곳이 아니라, 때때로 가리어서 보이지 않는 곳(物陰; ものかげ)의 한 면(半面)을 나타내는 것이며, 겉에 잘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음(隠微; いんび) 바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둑어둑하여 두려운 숲속에서 한 그루의 동백꽃을 보았다면 매우 아름다운 동시에 유쾌한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 동백꽃을 중심으로 쓰는 것이 좋긴 해도, 동백꽃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반드시 동백꽃을 상세하게 서술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숲속의 어둑어둑함에 대한 두려운 모양을 얼마간 상세하게 서술해서 나중에 동백꽃을 그려낸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분명히 감동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혹은 벚꽃놀이의 붐빔을 서술하는 것으로도 챠반(茶番), 메카쓰라(かつら), 벚꽃 비녀, 코토토이당고(言問団子; ことといだんご), 키누카쓰키(きぬかつき), 이것들의 활력을 극대화하여 상세하게 서술해도 여전히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최후에

 

파출소에서 두 미아가 울고 있다.

 

라고 하는 어구를 첨가하면 전체가 활동하는 것이 될 것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화룡점정(画龍点睛)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공론(空論)은 효력이 적다.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ほとゝぎす)를 본 사람은 이런 종류의 문자(아사쿠사지의 쿠사쿠사, 여자 점쟁이, 제야의 종)에 친숙해진다. 이런 문자를 사용해서 실패한 한 예로 2월 초에 지상잡기란(紙上雑寄欄) 안에 있는 정계(貞鷄)라고 제목을 붙인 것 하나를 예로 든다. (사전에 작자에게 무례를 사과한다). 정계(貞鷄)는 이틀(2) 계속 썼는데 첫날 분 정도는 허서(虚叙)로서 실서(実叙)가 없고, 허서에서도 때때로 다소의 실서를 섞어서 재미있는 궁리(工夫)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매우 평범해서 재미가 없었다. 다음 달 분 두 번째 난()은 실서(결말의 주관적 문자는 좋다)라고 하지만 조금도 재미있지 않아 오히려 장황(冗長)한 느낌이 든다. 첫째로 이 중요한 재미를 모르기 때문에, 두 번째로 작자가 취사 선택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이 정취(趣味) 없는 글을 만들게 된 것이다. 작자가 혹시 이 사실을 재미있도록 다잡는다면 보통의 사실은 틀림없이 짧게 서술될 것이고, 그 대신 어떤 한두 곳을 상세히 서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시험 삼아 먼저 평일 두 마리 닭과 가까워진 모양을 실서적(実叙的)으로 상세하게 서술한(원문은 허서적이지만 특별하게 재미있지 않다) 다음에 수탉이 개에게 물린 후에 깃털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상세히 서술하는 것 외에 생략할 수 있는 만큼 생략하여 짧게 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따로 고루 서술한 글에서도 재미없는, 더구나 사실에 재미가 없는 것은 그대로 당연한 것이 된다.

문체는 언문일치(言文一致) 또는 그에 가까운 문체가 사실(写実)과 적합한 것인가. 언문일치는 쉽게 귀에 들리는 것만을 주로 한다. 정계(貞鷄)의 글과 같은 언문일치의 안에서 부조화하기 쉬운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좋지 않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조롱하는 것과 별도로 그 재미의 실체는 존재한다. 사실적인 언어의 아름다움을 조롱한다면 사실의 정취도 잃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따로 주관적인 한두 구를 삽입해서 객관적인 서술을 하면 재미있게 되기 마련이다.

 

부기(附記): 연말연시의 보도를 함에 있어서는 모든 허서법(虚叙法)을 채택하고 실서법(実叙法)을 채택하지 않았다면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일에든 실서법에 따라 서술할 문장(西大寺会陽記와 같은)을 보내주시기를 간청한다.

日本付録週報 메이지(明治; めいじ) 33=1900.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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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付録週報, 신문 日本의 부록으로서 매주 발행되었다. 현재 일요판 같은 것이지만, 이것은 월요일에 발행되었다.

 

각주(클릭)

 서사문(叙事文) 마사오카시키(正岡子規; まさおかしき) 朱 根玉 역

 

마사오카시키(正岡子規; まさおかしき)

 

  참고자료

    SUR LES ROUES/Gueune-Ok JOUH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 A.J.Greimas/주근옥 역

  의미론선집(On Meaning); A.J.Greimas/주근옥 역

  정념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Passions); A.J.Greimas, Jacques Fontanille/주근옥 역

  미니멀리즘; C.W. 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와동주의(渦動主義)/Ezra Pound/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_주근옥

  한국 현대시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빛나는 성과_장수익(한남대 국문과 교수)

 

조선문학 통원 366호 (2021.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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